양방향내시경 척추 유합술 증례(부산큰병원 우영하 원장)
심장 같은 인물을 길러내자
유대교육에 관심 갖고 연구한지도 벌써 17년이다. 그런데도 아직 유대교육이 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만큼 유대교육은 방대하며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교육 내용들이나 형식들이 많다. 그게 토라 때문이다. 토라의 진리는 무한하니, 안다고 할 것도 없다. 유대인 중 20-30%는 종교인들이다. 그 종교인들의 학습법을 하브루타라고 한다. 일반 유대인들은 하브루타 스타일로 공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하브루타 스타일로 공부한 사람들 중에 인재가 많다. 하브루타는 단순히 공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적용하고 좋은 결과물을 얻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까지 말한다.
기독교인들에게 황금률은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일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황금률은 "신은 인간을 그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라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어서 우열을 가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첫번째 언약(구약)에 기록된 대로 "신은 인간을 그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라는 것이 먼저이고,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라는 것이 나중일 듯하다. 우선 신적 관계의 정립 연후에 인간관계의 정립이 이뤄져야 옳고 선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을 대접할 때 그 이웃을 어떻게 보느냐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웃이 신을 닮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으면 푸대접하거나 갑질하지 않겠는가?
신을 닮은 인간
유대교육의 목표는 신을 닮은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교육이념은 이 세상을 신이 거할 수 있는 거룩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유대교육의 이념이라는 것을 들어본 일은 없으니 100% 필자의 생각이다. 신의 형상은 모든 인간이 품고 있다. 하지만 죄악이 들어오면서부터 신의 형상이 가리워져 있다. 그래서 그런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과의 관계 정립, 이웃과의 관계 정립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교육의 형식과 내용에서 구현해줘야 그런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교육이념인 홍익인간과도 제법 통하는 면이 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은 세상을 정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이념에 맞는 교육의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있는지 실제로 그런 이념에 걸맞는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홍익인간은 유대인들의 티쿤올람 사상과 매우 유사하다. 티쿤올람은 히브리어로 "이 세상을 고친다"라는 뜻이다. 고친다라는 말에 이미 긍정적인 요소가 포함돼 있으므로,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라는 의미다. 세상은 완전하게 창조되지 않았기에 그 창조를 완성하는 것은 신과 인간이 함께 파트너십을 맺고 해나가야 할 과업이다. 어떤 세상이 좋은 곳이냐 하는 데는 많은 이견이 있으나, 정의와 진실, 평화가 이뤄진 세상이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이 지향할 바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제 신을 닮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인지 살펴보자. 신을 닮았다는 것은 형상(모양)을 닮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신은 물리적인 모양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의 무엇을 닮았다는 말인가? 유대인들은 그의 성품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럼 신의 그 많은 성품 중 어떤 성품을 닮은 것일까? 이에 대해 한 번은 랍비들이 모여 이 문제를 놓고 토론했다고 한다. 신의 어떤 성품을 닮아야 정말 닮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의 핵심 성품이 뭐냐는 것이다. 오랜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은 신의 성품 중 핵심은 '긍휼'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신을 닮았다고 말하려면 '긍휼'을 반드시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을 닮으려면 긍휼을 품어라
그렇다면 '긍휼'이란 무엇인가? 바로 가난한 자를 보면 돕고 싶어서 안달하는 마음을 말한다. 남을 돕고자 하는 열정이 뜨거워야 한다는 것이다. 토라에는 신의 긍휼을 표현하는 구절이 부지기수로 많다. 그 중에 하나를 살펴보면,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출애굽기 22:26-27).
여기서 자비로운 자임이니라에서 자비로운의 히브리어 단어는 하눈(Chanun)이다. 하눈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Compassion 즉 열정을 뜻하고 다른 말로 바꾸면 긍휼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다시 말하면, 나는 긍휼한 자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신의 긍휼은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가난한 자뿐 아니라 모든 악한 자에게도 마찬가지로 긍휼을 보이시는 것이 신의 마음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므낫세 왕이다. 유대왕국의 14대 왕인 므낫세는 히스기아왕의 아들로 온갖 못된 짓은 다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온갖 시련을 다 겪은 후에 깨달은 바가 있어 온 마음을 다해 회개하자, 하늘에서 신과 천사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천사들이 므낫세의 회개의 기도가 들리지 않도록 창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우주의 주인이시여, 우상을 숭배하고 성전에 우상을 세운 사람의 회개를 당신은 가납하시겠습니까?" 신이 말씀하셨다. "만약 내가 그의 회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미래의 모든 회개자들 앞에서 문을 닫아 걸어야 할 것이다." 신은 보좌 아래 굴을 파서 므낫세의 간청하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다. 죄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회개하는 영혼에게 긍휼을 보이는 것이 신의 진짜 모습이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고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탈무드, 산헤드린 10장>에 기록돼 있다.
그만큼 긍휼은 신의 핵심 성품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이 이 긍휼을 가르치기 위해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쩨다카(의무적 자선)을 실천한다. 유대인들은 의무적으로 자선을 실천해야 한다. 이 쩨다카가 얼마나 중요한지 랍비 아시는 613개의 계명 중 쩨다카 계명은 다른 612개의 계명을 다 합친 것과 맞먹는다고 주장할 정도다. 유대인 부모들은 영아기부터 아기의 손에 동전을 쥐어주고 그 동전을 잡은 손을 이끌어다가 쩨다카 박스에 집어넣게 한다. 그 광경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얼마나 철저하게 교육시키는지 모른다.
실제로 세상에는 부자와 빈자가 공존한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긍휼이 본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가난한 자를 왜 신은 방치하는 것일까? 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여기에는 매우 심오한 신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불공평한 듯 보이는 이런 세상의 구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신의 선한 의도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은 신은 항상 선하시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세상의 현상과 사건, 사고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게 맞다. 인간적인 생각과 시각으로는 불합리하고 불공정하고 불공평하며 불의한 것 같지만 그런 것에서조차 신은 그의 선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부자야 불만이 없겠지만 빈자들은 늘 불평불만이다. 신이 왜 그들을 돕지 않는지 모르겠다. 실제로는 신이 돕지 않는 게 아니다. 신은 긍휼의 신이다. 가난한 자를 보면 돕고 싶어한다. 다만 직접 돕지 않을 뿐이다. 신은 부자들을 통해 가난한 자를 돕고 싶어한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어떤 이방인이 말했다.) "만약 당신의 하나님이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라면 왜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돌보지 않는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제대로 공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그들을 냉대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당신들도 자선이란 선물로 그들을 도우면 안 된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도록 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사람들을 빈곤하게 하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자선을 베풂으로써 지옥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욱 의로울지 모른다. 그들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 가난이라는 고통을 감내했기 때문이다!”(탈무드 Bava Basra 10a)
부자는 신의 재산을 나누는 자다
부자는 사실 그 자신의 노력으로 부자가 된 게 아니다. 우리는 흔히 부자는 자신의 노력으로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의 축복을 입어야 부자가 될 수 있다. 자신의 노력으로 돈을 열심히 벌면 생계를 조금 풍족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격언에도 큰 부자는 하늘에서 내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특히 유대인들은 그들의 설날인 로쉬하샤나에 신이 하늘에서 부자를 점지한다고 믿는다. 신이 누구를 부자로 낙점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은 뇌물을 받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럼 부자를 자기 마음대로 낙점할 권리가 있는 신은 그렇게 부자가 된 이들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가 부자들을 통해 원하는 바는 자기를 대신해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를 심장으로 비유한다. 심장은 몸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다. 심장은 생사를 결정한다. 심장이 멈추면 삶이 멈춘다. 심장의 역할은 혈액을 온 몸으로 보내는 데 있다. 심장이 제 역할을 못하면 몸에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난다. 피가 몸의 구석구석으로 보내지지 못하면 괴사가 일어나고 온갖 병증이 나타난다. 건강이 망가지는 것이다.
부자도 마찬가지다. 신의 부를 떠안은 부자는 신이 원하는 대로 가난한 자들을 돌봐야 한다. 부자가 탐욕을 부리면 마치 심장이 피를 모으기만하고 순환시키지 않으면 몸에 큰 문제가 생기듯이 사회에는 엄청난 혼란이 발생한다. 부자는 나누는 것이 본업이다. 그런 부자의 본분을 다한 사람이 한국에도 있다. 그 사람이 바로 경주 최부자집이다.
경주 최부자집은 나눔을 실천한 대표적인 부잣집이다. 조선시대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보통 경주 최부잣집 또는 경주 최진사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부잣집에서 전해오는 전통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했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고 했다. 또한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며느리는 3년동안 무명옷을 입고 사방 100리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하라고 했다. 최부잣집의 1년 쌀 생산량은 약 3천 석이었는데 1천 석은 사용하고, 1천 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출처] 심장 같은 인물을 길러내자 (유대인 지혜의 숲, 탈무드원전연구소) | 작성자 탈무드교육전문가